공감 무능력자




후돌돌,,



아래 글은 어디선가 퍼온 역사적인 사실

-또 당시 어느 한 목격자의 증언은 소름끼치는 장면을 잘 그리고 있다.


1950년 …늦은 가을… 미아리 뒷골목에선 한낮인데도 하나는 군인 또 하나는 청년 이렇게 두 젊은 사내가 젊은 아낙 한 분을 ... 때려죽이는 살인 만행이 벌어지고 있었다....그렇게 쓰러졌던 아낙은 피를 머금은 채 ...두먹신처럼 일어서며 울부짖는 것이었다. "그분이 북쪽으로 갔는지 남쪽으로 갔는지 내 어찌 아느냐"고 항변한다. … 이렇게 몽둥이 들고 내려치기를 서른 번 남짓 마침내 지는 해와 함께 그 몽둥이 찜질 소리도 그 아낙의 비명소리도 더 이상은 아니 들려왔다(백기완, 1994:121∼122).-

 


-무차별 학살은 아산군 신창면 신창지서주임이던 유해진의 학살에서 잘 나타난다. 그는 150명의 양민을 학살한 혐의로 서울지검에 입건되었는데 그는 학살이 지나친 것이라 항의하는 박모 순경을 학살현장에서 총살시키겠다고 위협하였으며, 이 가운데 살아남은 이윤희 소년의 경우 아버지가 6.25때 행방을 감춘 것 때문에 그의 조부모, 어머니, 4살 난 여동생, 2살 난 남동생 등 5명이 학살당했다. 당시 어린이는 할머니와 어머니에 업힌 채로 줄에 묶여 살해당하였다. 그는 학살에 그치지 않고 정부 양곡을 도용하고, 좌익가족을 첩으로 삼고, 1.4후퇴 때에는 부하들에게 마을 부녀자를 농간하도록 하였다. 이후 이 지서 차석인 곽문석경사 에게 이를 묻자 그는 조금도 죄의식 없이 "그러한 일은 비단 신창지서뿐 아니라 전국 어느 곳에서도 안 일어났겠는가"라고 반문하였다 한다.15) 이러한 무차별적인 학살이 전국에 걸쳐 보편적이었음이 국회의원의 대 정부 질의에서도 뒷받침된다. 엄상섭 의원은 "통비라는 불확실한 혐의만으로 순경이 일가족을 총살"하고, 변진갑 의원은 "제2국민병 안 나온다고 죽이고, 소집불응에 죽이고 그 어머니까지 밥을 잘 못해준다고 사살"하였다 한다(서중석, 1999:641).-

 

 

-제대로 밝혀진 제2전선 양민학살 가운데 문경의 학살이 6.25이전에 이루어진 학살로서 그 야만성, 무차별성, 산간지역에 걸쳐 진행된 보편성, 조작성(양민을 공비와 통비로 조작)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면 6.25이후의 대표적 보기로는 거창 양민학살이다.

거창사건은 김영삼 문민정부에서 1996년 1월 5일 공포한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 제2조 정의인 "거창사건이라 함은 공비토벌을 이유로 국군병력이 작전수행중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가 시사하듯이 1951년 2월 10-11일 사이에 거창군 신원면의 양민 719명을 학살한 사건이다. 11사단 진주주둔 9연대 3대대(연대장 오익경, 대대장 한동석, 남원에 13연대, 광주에 20연대 주둔)가 신원면 주민 약 1천 명을 신원국민학교에 소집하여 경찰 및 지방유지 가족을 제외한 전원 719명을 박산골짜기에서 집단사살한 뒤 시체를 불태웠다. 그리고는 187명의 공비 및 통비분자를 소탕했다는 전과보고까지 했다. 피학살자는 남 331명 여 388명, 14세 이하 359명, 60세 이상 359여명이었다('거창양민학살사건 해결을 위한 청원서').

군은 이 학살을 은폐하려고 외부와의 왕래를 일체 차단하고 생존자에 발설하면 공비로 총살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러나 사단본부에서 3월 21일 사단장 최덕신의 명의로 "학살주민의 대부분이 양민이어서 군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지고 이 밖에도 부녀자 강간, 물품강요, 재산약탈 등으로 주민들이 분노하고 있다"라는 보고서를 올렸다. 이에 국방장관이었던 신성모는 "외국의 원조로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마당에 이 같은 비행이 외국에 알려지면 전쟁수행에 지장을 초래하고 군의 사기를 해친다"면서 "희생자 수는 187명이며 모두 통비분자였다"고 조작했다. 이후 국회·국방부 합동조사반의 현지조사 방문단이 신원면에 들어가려는 시점에서 백두산 호랑이 김종완이 매복시킨 위장공비의 위장공격으로 조사가 중단될 수밖에 없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군법회의에서 사단장 최덕신은 기소되지 않고, 연대장 무기, 대대장 10년, 소대장 이종대 무죄, 김종원 3년 언도를 받았으나17) 최덕신은 대사 등으로 출세가도를 달렸고, 김종원은 대통령 특별명령으로 석방되고는 전북경찰국장으로 복권되고, 이승만은 이를 이순신이 간신배에게 모함 당하듯이 음해를 입었다고 보았다. 사단장과 연대장도 1년도 안되어 석방되었다(서중석, 1999:676).-

 

 

-법률가협회보고서는 미군의 범죄행위를 아래와 같이 더 생생하게 기술하고 있다.


미국인들은 증인의 남편의 손과 귀와 코를 쇠줄로 꿰어 뚫었다. 그들은 방에 있던 노동표창장을 그의 이마에 못으로 박아 붙이고 그가 죽을 때까지 고문했다. 5세로부터 25세에 이르는11명의 우말재 가족의 자녀들은 즉석에서 총살되었다. 우말재의 며느리는 미국장병들이 그 시아버지를 고문하는 것을 보고 제지하려고 하였다. 미국인들은 이 여성의 머리채를 잡아서 나무에 비틀어 맨 다음 젖을 베고... 다음 불을 질렀다(김주환, 1989:187).


1950년 10월 25일 사리원시에서 MP완장을 찬 한 미국군인은 김창두라는 사람에게 끔찍한 살인을 감행하였다. 그는 칼을 가지고 목에서부터 아랫배까지 희생자의 피부를 째고 산채로 피부를 벗기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하다가 잘 안되니까 그는 희생자를 돌로 때려 죽였다. 1950년 11월 11일 한 젊은 여성은 3명의 미국인들에게 강간당하였다. 이 여성은 몹시 구타당하였으며 또한 발로 채였으며 그의 목구멍에는 물을 부어 넣었다. 다른 병정들은 56세 된 노파를 강간하였다(김주환, 1989:188).


이렇게 학살된 숫자가 172,000명에 이르는지는 공식적 발표 외에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아군지역인 남한 내에서 부역자 혐의 등으로 자행된 양민학살의 양태를 본다면 적군지역이라 간주된 북한지역에서의 학살은 그 정도가 훨씬 심했을 것이고 여전히 야만성, 무차별성, 보편성, 조작성 등이 작용했으리라고 추론할 수 있다. 북한의 공식적 기록은 주로 미군에 의해 학살이 저질러진 것으로 기술하고 있으나 역시 학살의 주도는 남한의 군경과 서북청년단 등이 맡았을 것이라 추측된다. 실제 강원룡 목사의 증언에 의하면 국방군을 따라 북한에 진입한 장사꾼들은 "마치 자신들이 점령군이나 되는 것처럼 칼만 안든 강도 짓을"하였다. 국회전문위원 이선교도 평양 시찰보고에서 "국군의 비행이 있고, 역시 유엔군의 비행도 다소간 있었던 모양입니다. 물론 여자를 능욕하는 것도...물품의 약탈은 굉장한 형편... 평양에 있던 악질도배들이 국군하고 돌아다니면서 공산당 물건이나 뺏는다는 행위를 거듭하기 때문에 그 시가에 혼란이라는 것이 한이 없습니다({국회속기록} 제8회 43호, 1950.11.4-서중석, 1999:750 재인용).-

 


-경찰 역시 군과 같이 대부분 일제하 일본군이나 경찰 출신으로 반공에 운명을 걸 수밖에 없는 인적 구성을 가진 집단이므로 군과 동일한 학살을 저질렀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경찰은 집단적 학살 못지 않게 개인적 수준의 학살이나 만행이 많았다. 물론 군경 모두 자의적 학살만행을 저지를 수 있는 근거는 이승만의 '비상사태하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이다.-

 

 

-북한측의 학살주체는 인민군을 중심으로 한 북한정권기관, 빨치산, 지방좌익이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인민군 중심의 정권기관은 북한 법에 의거하여 재판절차를 밟아 반동에 대한 처형을 감행하는 절제된 형식이었다. 또 공식적으로 만행을 금지시키는 명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 이후 후퇴하는 과정에서 법과 재판 및 절제적 처형은 지켜지지 않고 형무소 및 유치원에 수감된 우익반동을 학살하는 만행이 자행되었다. 지방 좌익은 대부분 보도연맹원 학살 피해당사자이기 때문에 보복감정에 치우쳐 인민군 진주직후 보복학살을 주도했다. 빨치산도 토벌대에 비해 학살이나 만행을 자제하였지만 때로는 산간마을 양민에 대한 학살만행을 저지른 것으로 알려졌다. 남과 북의 대조적 차이는 북한은 상대적으로 정권기관 차원에서는 재판과 법 및 고문금지 등 절제된 모습을 보였지만 지방좌익이나 빨치산이 야만성과 비적법성을 오히려 더 노정 시켰다. 반면 남한의 경우는 공권력인 국가기관인 군과 경찰이 비정규군 못지 않게 비적법성과 야만성, 조작성, 무차별성 등을 노정 시켰다. 이들 북한 측 학살주체에 의해 저질러진 피학살자 수는 정부의 공식적 주장인 129,000명 선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수적으로 남한 정부나 비정규무장단체 의해 주도된 숫자보다 훨씬 적다.-

 



-학살행위 유형에는 총살, 생매장, 초토화작전, 수장, 일본도에 의한 참살, 굶어죽이기, 때려죽이기, 폭격이나 비행기에서의 기총사수 등이 있다. 초토화작전과 비행기에서의 기총사수 등은 주로 미군에 의해 사용된 학살방법이고 미군은 제주 4.3항쟁 때부터 초토화작전을 시도했으며 실제 4.3항쟁에서 약 130 마을이 초토화되었다(김영훈, 2000:181). 물론 11사단을 중심으로 한 토벌대 역시 견벽청야라는 초토화작전으로 양민을 학살하였다. 수장은 주로 부산이나 통영 등 해안 가에서 많이 사용되었고 일본도에 의한 참수는 당시 일본군과 경찰에 복무하였던 김종원과 같은 친일파 분자들에 의해 보복성과 야만성을 과시하기 위하여 애용되었다.

학살 자체가 야만성의 발로이지만 상상을 초월한 극도의 야만성을 보여주는 사례를 제시하여 한국전쟁이 특히 이승만 정권에 의해 저질러진 양민학살이 얼마나 더러운 전쟁의 성격이었는지를 보겠다. 여기서의 양민학살은 주로 인륜적 기준에 의한 것에 중점을 둔다. 전쟁에는 모든 사람에게 야만성과 비극을 가져오지만 특히 연약한 부녀자와 어린이 및 노인에게 이들 야만성이 집중된다.

먼저 부녀자에 대한 강간 등 능욕과 관련된 야만성이다. 좌익으로 몰린 진영의 여교사는 얼굴이 예쁜 젊은 처녀들과 함께 능욕을 당하고 암매장되었는데 그녀는 다리까지 잘리었다. 또 충무·통영군 남녀 800여명의 학살은 헌병무관들이 부녀자 약탈의 은폐 책으로 빨갱이로 몰아 수장한 사건이었는데 이 당시 그들은 창고에 끌려가 남녀 모두 옷을 벗긴 채 구타를 당하였다(김삼웅, 1996:169). 남원군 대강면 강석리에서 11사단 205부대는 마을 주민 60여명을 살해하고 부녀자 7명을 끌어내어 대검으로 목과 유방, 심지어 음부까지 난자하여 모두 죽였다. 이번에는 19명을 일보도로 참수하였는데 김점동이 일본도에 의해 목을 두 번이나 내려쳐졌으나 죽지 않자 "더러운 놈 모가지가 왜 이렇게 질겨"하면서 장교는 세 번째 내려쳤다(서중석, 1999:620). 창원군 북면에서도 해군첩보대대장으로 황광수수병 등이 이곳 주민과 피난민 60명을 빨갱이로 몰아 살해하면서 어린애가 살려달라고 애원하자 일본도로 내리쳐 죽이고 부녀자들에게는 젖가슴을 칼로 자르고 팔다리를 절단하는 만행을 저질렀다(김삼웅, 1996:107-108). 이미 앞에서 보았지만 아산군 신창지서주임이던 유해진은 마을 부녀자를 농간하고 부하까지 농간하게 하고 좌익 측 부녀자를 첩으로 삼았다.

이제 인간으로서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反인륜과 패륜아 행위를 살펴보겠다. 이에는 6.25전후 가장 악명을 떨치던 일본군 출신이고 이승만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았던 김종완이 대표적이다. 그는 여수 등에서 일본도로 사람을 참수하는 것을 즐겼다. 이에 그치지 않고 그는 1950년 5월 6일 6.25전에 백골부대를 이끌고 거제도 일운면 구조리 앞 바다에 주민 1천명을 1시간 동안 찬물에 세워놓고 시아버지와 며느리, 장모와 사위 등 서로 어려운 사이를 골라 서로 마주 뺨을 때리도록 하고 만약 세게 때리지 않으면 총개머리판과 몽둥이로 난타하는 짐승 같은 짓을 저질렀다(서중석, 1999:583). 이 같은 '뺨때리기'와 '말태우기'는 흔히들 자행되던 보편적 현상이었다. 제주에서 토벌대는 주민들을 모아 놓고 시아버지를 엎드리게 하고 며느리를 태워 빙빙 돌게 하고, 할아버지와 손자를 마주 세워 놓고 서로 뺨을 때리게 하였다. 총살에 앞서 가족들을 앞에 세워놓고 총 맞아 쓰러질 때 가족들로 하여금 만세를 부르게 하기도 하였다(김종민, 1998:33).

통영에서는 죄 없는 양민 수십 명을 창고에 가두어 놓고 강제로 정교를 맺게 하고는 수장시켜 죽였고(김삼웅, 1996:108), 필자와의 면담에서 어느 육군상사는 시숙과 제수를 옷을 벗겨 강제로 정교를 맺게 하고는 덮석에 말아 굴리는 반인륜적인 만행을 저질렀다는 전언을 해와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가공스런 야수적 행위는 이미 제주에서부터 알려졌다. 처녀와 총각을 불러내어 서로 정교를 강요하였고(황상익, 2000:153 재인용), 처모와 사위를 대중이 모인 가운데 정조를 맺게 하고는 쏘아 죽이기도 하였다(김종민, 1998:33). 완도 경찰은 완도읍 두암리에 살던 좌익아들을 둔 할머니의 이야기다. 경찰이 그 아들을 죽이고는 아들의 간을 꺼내 할머니 입에 물리고는 마을을 돌아다니게 하였던 일이다. 그 할머니는 반 미친 상태에서 경찰이 시키는대로 하였고 13년형을 받아 7-8년 복역 후 석방되었으나 몇 달 후 죽었다고 한다(김삼웅, 1996:119).

이러한 반인륜적 행위가 단지 6.25 때문에 발생한 것만은 아니다. 이미 일본군국주의의 악랄한 인권말살주의에 물들어 있던 친일파, 곧 민족반역자들이 반공제일주의를 걸었던 미군정과 결합하여 그들의 생사를 걸고 남한사회의 권력을 장악하면서부터 구조적으로 잉태되었다. 실제로 미군정 당시에도 Mark Gain의 Japan Diary 에 서술되어 있듯이 경찰이 유사한 만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물론 6.25이전에도 4.3항쟁과 여수항쟁에서 보듯이 토벌대의 이러한 만행은 다반사였다. 단지 6.25이후 보다 대규모와 빈번히 일어났을 따름이다.-

 


-"지난날에 구애되어 앞날에 장애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이승만 식의 역사인식이나 "과거를 닫고 미래로 나아가자"는 베트남 정부의 반역사적인 고육지계는 우리가 취할 바는 아니다. 오히려 "불행했던 역사가 전진을 가로막는 족쇄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 불행했던 역사에 대한 청산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이 역사적 진리를 구체적 역사 속에서 실행시켜야만 우리는 새로운 21세기를 만들고 문명사회의 진정한 일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빨갱이, 빨갱이 걸핏하면 빨갱이를 죽어라 외치던 놈들은 무엇을 하고 살고 있을까요?
지네가 친일 해 놓고 해방되고나서 맞아죽을 거 같으니깐 독립군 잡던 스킬로
좌익 세력들을 잡아 족치는 구실로 물타기하면서 박정희 시대를 거쳐 지금까지 이 나라에서
고위 관직 하나씩들 꿰차고 권력을 행사하며 촛불시위를 빨갱이 시위로 매도하고 쳐앉아계시네요.
그 분들은 대대로 그래왔다 치고 시키면 하는대로 다 하는 우리 국민들은 왜 한나라당식 마인드를
가지고 세상 답답하게 살아가고 있을까요?
왜 미친놈들이 싸이코패스같은 새기들이 매번 항상 떵떵거리며 힘 없는 자들을
괴롭히며 행복하게 살고 있을까요? 아 씨발.
우리나란 법조계부터 썩었다.


[출처] /|작성자 빌빌


by YOMM | 2008/06/19 12:22 | Di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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